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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희망가] 비강상악동 미분화암과 14년… 서울대 약대 김규원 명예교수가 사는 법

기사승인 2020.09.15  12: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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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성된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진리를 믿습니다”

【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1976년, 서울대 약대를 졸업했다.

1985년, 미국 하버드의대 다나-파버 암연구소에서 쥐의 기형암종세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암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

2002년, 암 조직에서 혈관 생성에 핵심적인 단백질 인자를 조절하는 연구논문을 세계적인 학술지 <Cell>에 발표했다.

2003년, 제1회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수상했고, 2005년에는 호암상을 수상했다.

세계적인 석학들과 자웅을 겨룰 만큼 촉망받던 암 과학자! 그런데 누가 시샘이라도 한 걸까? 2006년,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 진단을 받았다.

우리나라 암 연구의 최일선에서 활약하던 주역이 암 환자가 되어버린 기막힌 현실!

이름도 생소한 희귀암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은 끈질겼다. 독한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두 번이나 재발의 발톱을 드러냈다.

그렇게 암과 사투를 벌여온 지도 어느덧 14년! 많은 것이 변했다. 미각도 잃고 후각도 잃었다. 청각의 일부까지 잃어 보청기를 껴야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일! 암 연구였다.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와중에도 암 연구를 계속해온 주인공!

서울대 약대 김규원 명예교수(68세)다. 정년퇴임 후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연구실에 나가 제자들과 암 연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암은 미로 속에 있지만 그 어둠의 미로에 작은 빛이라도 비추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김규원 교수를 만나봤다.
 

▲ 김규원 명예교수.


2006년 11월에…

코가 막히고 콧물이 많이 나왔다. ‘비염인가?’했다.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콧속에 물혹이 있다면서 간단한 수술로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수술인데….’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던 이유다. 젊은 의사가 코 안쪽의 조직을 떼어내면서 한 말은 “80~90%는 양성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며칠 후 듣게 된 조직검사 결과는 청천벽력이었다. 김규원 교수는 “악성 종양이라고 했고, MRI 검사 결과 직경이 5~6cm 크기여서 3기에 해당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갑자기 멍해졌다. 실험실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암이었다. 암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논문을 읽고, 학술세미나도 다니며 절치부심했던 20년 세월이었다. 그런데 암?
김규원 교수는 “갑자기 시커먼 암흑덩어리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한다.

 

수술도 못 하고…

54세의 한창 나이! 암이 만들어내는 신생혈관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던 참에 악성 종양 진단을 받았던 김규원 교수!

실험실 밖의 암은 너무 낯설었다. 무서운 위력을 가진 존재였다. 수술 일정이 잡히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오른쪽 눈과 윗니를 드러내야 한다고 했다. 상상도 안 됐다.

그동안 암은 연구를 같이 해 온 일종의 동료와도 같은 존재였다. 때로는 우군처럼 친밀감마저 느끼던 대상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생사를 위협하고 나선 거였다.

김규원 교수는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는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눈과 윗니는 제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수술 도중 시행한 조직검사에서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었다. 비로소 암은 그 정체를 드러냈다. 급속히 자라는 악성미분화암인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으로 판정되었다. 수술보다는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가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던 이유다.

김규원 교수는 “수술 마취가 풀렸을 때 눈과 이가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지만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이 앞으로 어떤 실체를 드러낼지 몹시 두려웠다.”고 말한다.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 알아보니…

이름도 생소한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 어떤 암일까 궁금했다. 문헌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자료가 별로 없었다. 극히 희귀암으로 분류되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증식 속도가 매우 빨라서 판정 후 생존 기간이 수개월에 불과한 고약한 악성 종양으로 보고돼 있었다. 치료법도 확립된 게 없었다.

 

▲ 김규원 교수는 희귀암인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으로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암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규원 교수는 “앞으로 살날이 몇 개월밖에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아내와 딸에게 유서를 썼던 이유다. ‘힘들 때나 아빠가 보고 싶을 때 너의 손을 보아라. 너는 손이 유난히 길고 가늘어 내 손과 많이 닮아 있지.’

김규원 교수는 “고1 딸에게 유서를 쓰면서 느꼈던 막막했던 절망감은 잊히지 않은 영상으로 뇌리에 남아 있다.”고 말한다.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로 초주검

2006년 12월 12일, 1차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코 안의 암 덩어리가 커져서 숨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세 가지 항암제를 6일 동안 계속 맞았다. 입안이 헐고, 구역질이 났다. 순식간에 민머리가 되고 온몸의 모든 기능이 막힌 듯했다. 그동안 암을 연구하면서 알고 있던 지식도 소용이 없었다.

김규원 교수는 “암은 몸의 모든 감각과 기능에 극도의 이질감과 고통을 안겨주면서 죽음의 공포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2007년 1월 3일, 2차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또다시 항암제로 온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김규원 교수는 “독한 항암제가 암을 치료할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내 몸의 노후 조직세포도 새롭게 재건되고 교체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견뎌냈다.”고 말한다.

2007년 1월 25일, 3차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독한 항암제로 온몸이 다 아파서 앉아 있을 수도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오로지 아픈 감각만 지닌 몸뚱아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김규원 교수는 “그나마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걸음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걷기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이 공명하도록 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이겨냈다.”고 말한다.

2007년 2월 27일, 방사선 치료가 시작됐다. 30회에 걸친 방사선 치료가 끝났을 때 몸무게도 많이 줄고 가발도 써야 하는 딱한 처지가 돼 있었지만 안도했다.

김규원 교수는 “3차의 항암치료와 30회의 방사선 치료를 통해 암세포의 크기가 크게 줄어들었고, 림프절이나 폐로의 전이도 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언제든 또다시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은 있다고 했다. 재발 여부를 자주 검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우려가 현실로…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딱 3년 만이었다. 또 다시 격랑 속으로 내몰렸다. 재발의 덫에 빠졌다.

2010년 4월, 1차 재발이 일어났다. MRI 검사 후 조직검사 결과 같은 종류의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으로 판명되었다. 독한 항암제와 방사선 공격에도 극히 일부가 살아남아 다시 왕성하게 세포 분열을 한 거였다. 재발한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2012년 4월, 2년 만에 2차 재발이 일어났다. 본래 위치에서 귀 쪽으로 좀 더 이동해 그 존재를 드러냈다. 내시경 수술을 했지만 암세포가 미세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어 방사선과 항암제 치료도 병행했다.

두 번에 걸친 재발의 후유증은 혹독했다. 김규원 교수는 “이때 생긴 후유증으로 후각과 미각 상실, 이명, 청각장애, 어지럼증, 구강건조증, 턱관절장애, 삼킴장애, 심지어 얼굴 괴사까지 줄줄이 이어진 병마로 초주검이 됐다.”고 말한다.

 

2020년 현재 김규원 교수는?

최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연구실에서 만난 김규원 교수는 건재했다.

비록 양쪽 귀가 안 들려 보청기를 끼고 생활하지만 의사소통도 그런대로 문제가 없었다.
재발 치료의 후유증으로 눈과 코 사이에 괴사가 일어나 11번의 수술로 흉터도 생겼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김규원 교수는 “2012년 2차 재발 후 암이 잠잠한 덕분에 그동안 암 연구를 계속할 수 있어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암 연구는 밥을 먹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이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독한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 와중에도 결코 암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유다. 두 번의 암 재발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암 연구였다.

김규원 교수는 “암 환자가 되고 더 절실히 암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고 말한다.

‘독한 항암제에도 끈질지게 살아남는 강한 생명력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궁금했다.

‘어떻게 암세포들은 독한 항암제와 방사선을 극복하고 생존할 수 있는 내성을 획득할까?’ 알고 싶었다. 

‘왜 암세포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생존의 터전마저 파괴시키며 계속 증식하고 침윤하고 먼 장기로 전이를 일으키는 걸까?’ 너무도 알고 싶었다. 

2015년, 재발 치료의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매면서도 <과학의 발전과 항암제의 역사>라는 책을 펴낸 것도 그래서다. 1세대 항암제부터 시작된 항암제의 역사를 집대성 해놓았다.

2017년, 모든 약의 특성과 개발 과정을 총집대성한  <약의 역사>를 펴낸 것도 그 일환이다.
김규원 교수는 “미래 암 연구의 길로 들어선 누군가의 행보에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항암제의 역사>와 <약의 역사>를 집대성한 책을 발간했다.”고 말한다.

 

▲ 김규원 교수는 미래 암 연구에 보탬에 되기 위해 <과학의 발전과 항암제의 역사> <약의 역사>를 펴내기도 했다.

 

3년 전 정년퇴임을 했지만 아직도 일주일에 3일 정도는 학교에 나와 암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김규원 교수!

건강은 괜찮을까? 김규원 교수는 “1년에 한 번씩 정기체크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아직은 암 완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암은 언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리 걱정부터 하지 않는다. 14년간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희망의 보루로 삼았던 말! “생성된 모든 것은 변하면서 소멸한다.”는 진리를 지금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생겼다가 없어진다. 암으로 인한 고통과 두려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자신의 암 체험담을 낱낱이 기록한 <미로 속에서 암과 만나다>를 펴내 화제다. 35년간 암 연구를 해온 암 과학자의 항암일지여서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규원 교수는 “저 같은 희귀암 환자도 살아남았다.”며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첫째, 생성된 모든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진리를 믿으라는 것이다. 한 번 생긴 암의 고통과 두려움도 언젠가는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암치료와 후유증으로 변화된 몸에 마음을 공명시키라는 것이다.

김규원 교수는 “언제일지 모르는 재발의 두려움도, 크고 작은 암 치료 후유증에도 마음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몸의 변화에 마음이 공명하면서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도 자신의 몸에 아직 남아 있는 신비로운 것들에 감사하며 암 연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김규원 교수!

앞으로 암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암 연구자의 길을 계속 걷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꿈이 우리나라 암 연구사에 커다란 족적으로 남길 기대해 본다. 

허미숙 기자 kunkang1983@naver.com

<저작권자 © 건강다이제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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