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주고 몰입하고 알리자
【건강다이제스트 | 이후경(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경영학 박사, LPJ마음건강의원 대표원장】
국내 화병 환자가 늘고 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5년 새 40% 이상 증가했다. 특히 20대 환자의 경우 90% 이상 늘었다.
화병은 미국 정신장애 편람에 등재된 정신질환이다. 참는 게 미덕이던 유교문화권에 속한 한국 고유의 문화병이다.
화병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화병은 국내 유병률이 5~10%에 달한다. 과거 가부장적 가정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낸 중년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성별을 불문하고 2030세대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청년의 높은 발병률은 입시·군대·취업·결혼 등 다양한 스트레스를 안고 사는 고된 삶을 반영한다.
화병은 한(恨)이 쌓여 화(火)를 삭이지 못해 생긴 병이다. 신체 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으로, 우울과 분노를 억누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가슴 통증·우울증·신체 증상으로 나타난다. 가슴에 돌덩이가 누르고, 명치에 불덩이가 뻗치고, 목 안에 덩어리가 느껴진다.
우울·불안·분노보다 억울함·섭섭함·울화를 호소한다. 맥이 빠지고, 소화가 안 되고, 두통·불면·어지럼증으로 나타난다.
내향적·감성적·수용적인 사람이 잘 걸린다. 여성에서 주로 오지만 취업에 거듭 낙방한 청년, 상사에 시달리는 직장인, 사업에 실패한 남성에서도 나타난다.
화병은 표현 안 하는 습관에서 온다. 수개월에서 수십 년에 걸쳐 발병한다. 참는 것을 당연시하는 문화에서 온다. 남성주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권위주의 사회에서 약자에게 잘 생긴다.
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해지는 환경에서 온다.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말한들 뾰족한 수가 없는 경우다. 가족을 위해 나 하나 희생하려 한다.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사회에서 온다. 불합리한 구조에서 억압당한 경우다. 겉으로 표현을 안 할 뿐이지,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는다.
화병은 우울증과 다르다. 화병은 멀쩡하게 생활한다. 표현을 안 하는 습관 때문에 상처는 계속 쌓인다. 우울증은 생활이 엉망이다. 마음을 보호하려 외부를 차단한 상태라 더 이상 상처는 안 쌓인다.
화병은 감정과 사실이 명확하다. 섭섭한 원인이 있고, 화나는 대상도 있다. 우울증은 감정과 사실이 모호하다. 그냥 우울하고, 대상도 안 떠오른다.
화병은 히스테리와 다르다. 둘 다 신체 증상을 동반한다. 실제 병이 없는데 여기저기 아프다. 화병은 강렬한 고통을 호소하지만, 히스테리는 고통에 초연하다.
화병은 발작과 소진을 반복한다. 화가 밖으로 폭발하면 발작이 오고, 안으로 폭발하면 소진이 온다. 발작은 정신증과 유사하고, 소진은 중증 우울증에 가깝다.
화병은 치료가 어렵다. 일단 발병하면 오래 진행된 것이라 심각하다. 참는 사람과 함께 살면 편안하다. 모든 것을 받아주고, 힘든 일도 감수한다. 하지만 언젠가 가까운 사람에게 폭발한다.
화병은 예방이 중요하다. 무조건 참는 습관을 고쳐야 한다. 화병은 작은 상처가 오래 쌓여 생긴 병이다. 작은 것부터 표현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비폭력 대화’란 게 있다. 비폭력은 마음속 폭력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비폭력 대화는 평화로운 관계를 목적으로 한다. 내 욕구와 남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대화다. 감정, 사실, 의도, 요청으로 구성된다. 감정(Affection)은 마음속 느낌을 확인하는 것이다. 사실(Fact)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다. 의도(Intention)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요청(Request)은 평화를 위해 상대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순서는 중요치 않다. 모든 감정 찌꺼기의 80%는 요청을 안 하는 데서 온다.
화병을 치료하는 탁월한 처방 셋!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나 하나 희생하다 화병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화병 치료를 위한 탁월한 처방은 무엇일까?
첫째, 들어주자. 어머니와 인연을 끊기는 어렵다. 쌓인 화를 들어줄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 돌아가면서 들어주자. 대면보다는 전화가 좋다. 발작은 막을 수 있다. 문자나 카톡도 좋다. 규칙적으로 소통해야 효과가 있다. 들어준다고 화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이 없는 경청(Listening)은 위험하다. 함께 모여서 들어주자. 일대일보다 일대다가 좋다. 소진은 막을 수 있다. 자칫 과거 얘기를 반복하는 습관으로 굳어진다. 털어놓는다고 화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이 없는 정화(Catharsis)는 허망하다.
둘째, 무언가에 빠지게 하자. 어머니는 표현할 대상이 필요하다. 중독이 되겠지만 고통에선 해방된다. 신앙을 가지는 게 효험이 있다. 특별히 어떤 종교냐는 중요치 않다. 광신자가 되어도 괜찮다. 믿음은 희망을 가져온다. 운동이 중요하다. 화병은 여기저기 아프다. 체력 강화가 필요하다. 응어리가 풀리고, 통증이 사라진다. 매일 해야 효과가 있다.
기분전환이 중요하다. 여행·노래·봉사 등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좋다. 기분이 좋아지면 부정 감정이 사라진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에서 큰 상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셋째, 알리자. 어머니는 화병에 대해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폭발할 수 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까? 자신부터 돌아보도록 알리자. 화병의 원인은 남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다.
평생 희생했지만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과거는 그만 말하도록 알리자. 화병이 오면 과거 한(限)을 반복해서 터뜨린다. 가족들이 충분히 알고 있다. 얼마나 더 알아줘야 하는가? 지금부터는 현재와 미래를 말해야 한다. 작은 거라도 참지 말고 표현하도록 알리자. 참았다 한꺼번에 표현하면 폭발한다. 반복되는 폭발로 숭고한 희생이 퇴색한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이후경 박사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경영학 박사, LPJ마음건강의원 대표원장, 연세대 의과대학과 동대학원을 거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연세대 경영대학원과 중앙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7년 동안 경제주간지 『중앙 이코노미스트』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사례로 풀어본 한국인의 정신건강>, <아프다 너무 아프다>, <임상집단정신치료>, <와이 앰 아이>, <힐링 스트레스>, <관계 방정식>, <변화의 신>, <선택의 함정> 등 1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이후경 박사 kunkang198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