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제약물사용의 명과 암
【건강다이제스트 | 서울대학교병원 임상약리학과 이형기 교수】
나이가 들면 하나둘 새로운 질병이 발생한다. 짜고 기름진 음식을 선호하고, 운동을 게을리하며 앉아서만 지내거나, 음주와 흡연을 절제하지 못하면 질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산업화 이후로 살기는 편해졌지만 질병을 서너 개 달고 사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많은 이유다.
이런 경우를 조금 어려운 말로 ‘다상병(多傷病)’, 즉 여러 질병을 한꺼번에 앓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다상병 환자는 각각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약물을 동시에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한 번에 사용(투약)하는 약물의 개수가 많아진다. 특히 동시에 투여하는 약물의 숫자가 5개 이상인 경우를 ‘다제약물사용(polypharmacy)’이라고 부른다.
이럴 경우 문제는 없을까? 다제약물사용의 명과 암을 소개한다.
건강보험공단의 외래 처방 자료를 이용해 노인(65세 이상) 환자에서 다제약물사용 및 초다제약물사용(hyperpolypharmacy, 동시에 10개 이상의 약물 사용)이 얼마나 흔한지 조사한 논문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90일이 넘도록 다제약물을 사용한 환자의 비율(이하 유병률有病率, prevalence rate)이 41.8%, 초다제약물사용 유병률은 10.4%에 달했다.
5년 전 자료임을 감안하더라도 올해 다제약물사용 노인 환자가 4백만 명을 훌쩍 넘는다는 계산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다제약물사용이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성인 환자 중 다제약물사용자의 비율은 37%로 비교적 흔하다.
그러나 국내 노인 환자의 다제약물 사용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빈번한 편이다. 예를 들어 3개월 이상 5개 이상의 약물을 사용하는 75세 이상 환자의 비율이 한국은 70.2%로, OECD 국가 평균인 48.3%보다 훨씬 높다.
한국의 노인 환자에서 다제약물사용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우선 의료 접근성이 매우 좋다는 사실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집에서 조금만 나가도 병원에 갈 수 있다. 게다가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묶여 지방에 사는 환자라도 원하면 하루에 여러 병원을 돌며 약을 처방받는 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환자가 여러 병원을 방문해 진료를 받으면 다른 병원에서 어떤 약을 처방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이는 같은 약을 중복해 처방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접근성은 높지만 분절된 한국의 의료 환경이 다제약물사용을 용이하게 만드는 셈이다.
약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문화도 다제약물사용을 부추긴다. 병원에 갔는데 약 처방을 받지 않으면 뭔가 서운하고 손해 본 느낌을 갖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의사도 환자의 이런 속내를 잘 안다. 그래서 굳이 약을 쓰지 않아도 되는 환자라 해도 자연스레 처방전에 손이 간다.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병 주고 약 주는 다제약물사용
다제약물사용은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우선 다제약물사용은 환자, 특히 노인 환자에서 입원율을 18%, 총사망률을 25%나 올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제약물사용 노인 환자는 골절 위험이 높다. 왜냐하면 노인 환자의 다제약물사용은 과잉진정(oversedation), 어지럼증과 균형감각 상실을 초래해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제약물사용 노인 환자에서 치매가 더 흔하게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제약물사용은 또 다른 건강 문제와 연결된다. 우선 ‘잠재적으로 부적절한 약물 처방(PIP, potentially inappropriate prescribing)’의 위험성이 커진다. 꼭 필요하지 않거나 환자의 질병 상태에 맞지 않는 약을 처방하는 경우가 흔해진다는 뜻이다.
부적절한 약물 처방은 특히 노인 환자에서 정신 또는 신체 기능을 낮추고 약물 유해반응(adverse drug reaction)이 발생할 위험을 높인다.
또한 동시에 사용하는 약물의 숫자가 많다 보니 약물끼리 상호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약물상호작용은 약물 유해반응의 발생 위험을 높여 결국 입원, 질병 발생 및 사망 위험이 올라간다.
어떤 경우에는 약물 유해반응을 치료하려고 또 다른 약을 추가로 써야 하는, 소위 ‘연쇄 처방’의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병 주고 약 주는’ 식이다.
반면 어떤 경우에는 다제약물사용이 초래할 문제를 염려한 나머지 꼭 필요한 의약품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의사가 처방하지 않는 ‘과소처방(underprescribing)’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종합적으로, 다제약물사용은 환자 본인은 물론 사회 전체의 의료비 상승을 초래한다.
다제약물사용 클리닉 개설도 고려해야
다제약물사용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한 정부는 그동안 다양한 관리 사업을 통해 제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역 사회 기반 ‘올바른 약물이용 지원 사업(2018)’, ‘올바른 약물이용 지원 사업의 확대 및 의원 모형 도입(2019)’, ‘다제약물 관리 사업 및 병원 모형 도입(2020)’, ‘병원 외래 환자 관리 모형 도입(2022)’과 같은 정책을 지속적으로 집행했다.
정부 정책에 힘입어 서비스 이용 3개월 후에 대상 노인 환자의 재입원 위험이 21% 감소했고, 응급실 방문 위험은 50%까지 떨어졌다. 100명의 환자에게 다제약물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면 4명의 재입원을 예방해 의료 비용을 1689.3만 원 절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외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다제약물 클리닉에서 노인 환자를 진료하는 1차 의료진을 대상으로 약물 검토 중재를 수행한 결과 환자 당 280만 원의 의료비를 줄이고 0.026년의 질보정수명(QALY: 아프지 않은 건강한 수명을 의미함)이 연장됐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주도한 다제약물사용 관리 사업은 일회성의 시범 사업이었다. 거기다 관련된 수가나 인센티브가 미미했고, 여러 의료기관과 진료과를 아우르는 통합적인 약물 관리 서비스로 이어지지 않아 정책의 실효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역 약국이 주도하는 다제약물사용 관리 사업에서는 약사가 환자의 임상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처방이 부적절한지 판별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마찬가지로 약사가 주도하는 병원형 다제약물사용 관리는 의사의 처방 변경이나 조정으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커 효과가 낮았다.
다제약물사용을 유도하는 사회문화적 행태와 분절적인 한국의 의료체계를 고려하면 지금까지 정부가 주도해 온 정책이나 시범사업의 성과가 크지 않았던 이유가 이해된다.
대부분의 임상의사는 다제약물사용의 심각성을 잘 인지한다. 하지만 다제약물사용이 초래하는 가장 큰 문제인 약물 간 상호작용에 따라 약물 유해반응이 발생하는 임상약리학적 기전을 모르거나 놓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다제약물사용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환자, 특히 노인 환자의 상황에 따라 다제약물사용이 필수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부적절한’ 다제약물사용, 즉 환자에게 해를 가할 가능성이 크거나 필요하지 않은 사례를 골라내 적절한 중재를 하되, 환자 개개인의 임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요컨대 단순 문헌 조사 이외에도 환자의 건강 상태를 포괄적으로 파악해 교정해야 할 문제와 우선순위를 선별할 수 있는 임상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의약품과 환자 진료를 모두 잘 아는 전문의의 주도로 다제약물사용을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의료 행위에는 고도의 경험과 지식이 뒷받침돼야 하므로 적절한 수가 보상이 필요하다.
다제약물사용 관리가 클리닉을 통해서 제공된다면 더욱 효율적일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도 2022년 12월에 발표한 ‘노인의 부적절한 다약제 사용 관리 기준 마련’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보건기관, 종합병원 이상 의료기관 또는 공공병원, 대학병원에서 …(중략)… 관련 클리닉 등을 개설할 필요가 있음” 을 강조한 바 있다.
또한 환자의 포괄적인 약물 사용 이력을 파악하려면 다른 의료기관 및 의료진과 다제약물사용 현황을 확인하고 공유하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도구로써 플랫폼(앱 또는 웹사이트)을 활용할 수 있다. 특히 플랫폼은 환자 및 보호자(가족, 요양보호사)에게 다제약물사용의 심각성과 대처 방법을 교육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한국은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중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다제약물사용은 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건강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보건의료계가 동참해야 할 뿐만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만 해서는 곤란하다. 환자가 주도적으로 다제약물사용 문제를 인지하고 먼저 보건의료 전문가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할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병원 임상약리학과 및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 2017~2021년 서울의대 임상약리학 협동과정 주임교수를 역임했다. 1999년 도미해조지타운의과대학, 피츠버그의과대학, UCSF 약학대학에서 근무했으며, 미국 FDA 객원연구원 및 '의약품개발과학센터' 최초 아시아인 디렉터로 활동했다. 2012년 귀국 후 50건 이상의 임상 연구를 주도했고 2017년부터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에 CCADD를 설립해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신약 개발을 수행할 수 있는 융합 기술 창출을 주도하고 있다. 2021년 PMATCH를 창업해 인공지능 기반 건강기능식품 큐레이션 앱인 건전지(건강기능식품 정보를 전부 모아 지키자 내 건강)를 개발했다.
이형기 교수 kunkang1983@naver.com